과학 혁명의 구조 서문, 토마스 새뮤얼 쿤
살아가면서 한번은 읽어 보면 좋을 책을 다 읽지는 못하여도 서문을 한번 읽어 보는 것은 좋겠다고 생각하여 한 권씩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패러다임 시프트(paradigm shift)'라는 개념 제시로 유명한 토머스 새뮤얼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의 서문을 읽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서문을 읽는 이유는 이 책을 집필한 의도를 알 수 있고 이야기를 어떻게 전개해 갈 것인지를 논리정연하게 제시하고 있어, 책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을 미리 파악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서문을 많이 읽는다면 언제가 나 자신의 책을 집필할 때에도 분명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토마스 새뮤얼 쿤은 1962년 출간한 《과학 혁명의 구조》는 물리학자, 역사학자, 철학자 뿐만 아니라 모든 학계와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지금도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패러다임 시프트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쿤은 오래 동안 알고 있던 관념이 명백하게 과학적 증거에 의하여 잘못된 것이라고 증명되었을 때에도, 그 관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거의 믿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오래동안 그 관념을 생각을 지지해온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오래된 관념은 지속된다는 점을 알아내었습니다.
* 번역 부문은 틈틈히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점은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The Structure of ScientificRevolutions, Thomas S. Kuhn
과학 혁명의 구조, 토마스 쿤
Preface
서문
The essay that follows is the first full published report on a project originally conceived almost fifteen years ago. At that time I was a graduate student in theoretical physics already within sight of the end of my dissertation. A fortunate involvement with an experimental college course treating physical science for the non-scientist provided my first exposure to the history of science. To my complete surprise, that exposure to out-of-date scientific theory and practice radically undermined some of my basic conceptions about the nature of science and the reasons for its special success.
이 에세이는 거의 15년 전에 원래 구상하였던 프로젝트에 대하여 최초로 전체를 출판한 보고서입니다. 그 당시 나는 이미 학위 논문 마무리를 눈앞에 두고 있던 이론물리학 대학원생이었습니다. 비과학자를 위한 물리학을 다루는 실험 물리학 과정에 운 좋게 참여하면서 과학사를 처음 접하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시대에 뒤떨어진 과학 이론과 실험에 대한 경험은 과학의 본질과 과학의 특별한 성공에 대한 이유에 대한 나의 기본 개념을 근본적으로 뒤 바꿔게 했던 것입니다.
Those conceptions were ones I had previously drawn partly from scientific training itself and partly from a long-standing avocational interest in the philosophy of science. Somehow, whatever their pedagogic utility and their abstract plausibility, those notions did not at all fit the enterprise that historical study displayed. Yet they were and are fundamental to many discussions of science, and their failures of verisimilitude therefore seemed thoroughly worth pursuing. The result was a drastic shift in my career plans, a shift from physics to history of science and then, gradually, from relatively straightforward historical problems back to the more philosophical concerns that had initially led me to history. Except for a few articles, this essay is the first of my published works in which these early concerns are dominant. In some part it is an attempt to explain to myself and to friends how I happened to be drawn from science to its history in the first place.
그러한 개념은 내가 이전에 일부는 과학 교육 자체에서, 다른 일부는 과학 철학에 대한 오랜 관심에서 끌어낸 것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것은 교육학적 유용성이나 추상적 개연성이 무엇이든 간에 그 개념은 역사적 연구가 보여주었던 의도에 전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과학에 대한 많은 토론의 기본이었고, 따라서 진실성에 대한 실패는 충분히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결과 물리학에서 과학의 역사로, 그리고 점차적으로 상대적으로 단순한 역사적 문제에서 처음에 나를 역사로 이끈 더 철학적인 문제로 들어가게 하여 내 경력 계획의 급격한 변화를 주었습니다. 몇 개의 기사를 제외하고 이 에세이는 이러한 초기 관심사를 정리한 나의 출판된 첫 번째 글입니다. 어떤 부분에서는 내가 어떻게 처음으로 과학에서 역사로 이끌리게 되었는지를 나 자신과 친구들에게 설명하려는 시도이기도 합니다.
My first opportunity to pursue in depth some of the ideas set forth below was provided by three years as a Junior Fellow of the Society of Fellows of Harvard University. Without that period of freedom, the transition to a new field of study would have been far more difficult and might not have been achieved. Part of my time in those years was devoted to history of science proper. In particular I continued to study the writings of Alexandre Koyré and first encountered those of Emile Meyerson, Hélène Metzger, and Anneliese Maier.1 More clearly than most other recent scholars, this group has shown what it was like to think scientifically in a period when the canons of scientific thought were very different from those current today. Though I increasingly question a few of their particular historical interpretations, their works, together with A. O. Lovejoy’s Great Chain of Being, have been second only to primary source materials in shaping my conception of what the history of scientific ideas can be.
다음에 설명할 아이디어 중 몇 가지를 깊이 있게 추구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는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의 Society of Fellows에서 주니어 펠로우 Junior Fellow로서 3년 동안이었습니다. 그러한 자유가 없었다면 새로운 연구 분야로의 전환은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고 어쩌면 달성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시절동안 나의 시간 일부는 제대로 된 과학의 역사에 바쳤습니다. 특히 나는 알렉상드르 코예Alexandre Koyré의 글을 계속 연구하면사 에밀 메이어슨 Emile Meyerson, 엘렌 메츠거 Hélène Metzger, 아넬리제 마이어의 Anneliese Maier의 글을 처음 접하기도 했습니다1. 이 석학들은 다른 대부분의 최근 학자보다 더 명확하게, 과학적 사고의 규범이 오늘날과 매우 달랐던 시기에 과학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더 명확히 보여주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특정한 역사적 해석에 대해 점점 더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아서 O. 러브조이 Arthur O. Lovejoy의 《위대한 존재의 대사슬 The Great Chain of Being: A Study of the History of an Idea》을 공부하면서 과학사상의 역사가 무엇일 수 있는지에 대한 나의 개념을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원천이 되는 두 번째 기회였습니다.
Much of my time in those years, however, was spent exploring fields without apparent relation to history of science but in which research now discloses problems like the ones history was bringing to my attention. A footnote encountered by chance led me to the experiments by which Jean Piaget has illuminated both the various worlds of the growing child and the process of transition from one to the next.2 One of my colleagues set me to reading papers in the psychology of perception, particularly the Gestalt psychologists; another introduced me to B. L. Whorf’s speculations about the effect of language on world view; and W. V. O. Quine opened for me the philosophical puzzles of the analytic synthetic distinction.3 That is the sort of random exploration that the Society of Fellows permits, and only through it could I have encountered Ludwik Fleck’s almost unknown monograph, Entstehung und Entwicklung einer wissenschaftlichen Tatsache (Basel, 1935), an essay that anticipates many of my own ideas. Together with a remark from another Junior Fellow, Francis X. Sutton, Fleck’s work made me realize that those ideas might require to be set in the sociology of the scientific community. Though readers will find few references to either these works or conversations below, I am indebted to them in more ways than I can now reconstruct or evaluate.
그 당시 시간의 대부분을 과학의 역사와 뚜렷한 관련 없이 분야를 탐구하는 데 보냈지만 지금하고 있는 연구는 역사가 내 주의를 환기시킨 문제와 같은 문제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연히 접한 각주에서 장 피아제 Jean Piaget가 성장하는 어린이의 다양한 세계와 한 세계에서 다음 세계로 넘어가는 과정을 모두 조명하는 실험으로 이끌었습니다2. 동료 중 한 명은 나에게 지각 심리학, 특히 게슈탈트 Gestalt 심리학자들(형태주의 심리학자들)의 논문을 읽도록 안내했습니다. 다른 한 명은 언어가 세계관에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연구한 벤자민 리 워프 Benjamin Lee Whorf의 추측을 소개했고, 윌러드 밴 오먼 콰인 Willard Van Orman Quine은 나에게 분석-종합 구분 명제라는 철학적 퍼즐을 열어주었습니다3. 그것이 바로 Society of Fellows가 허용하는 일종의 무작위 탐색으로 이를 통해서만 루드비크 프렉 Ludwik Fleck의 거의 알려지지 않은 논문인 《과학적 사실의 기원과 발전 : 사고 양식과 사고 집단에 관한 이론, Entstehung und Entwicklung einer wissenschaftlichen Tatsache. (Basel, 1935) 》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주니어 펠로우인 프랜시스 Francis X. Sutton의 연구는 그러한 아이디어가 과학계에서도 사회학의 관점이 설정되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비록 독자들이 이 책의 글 속에서 언급을 거의 찾지 못하겠지만, 내가 지금 재구성하거나 평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면에서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The final stage in the development of this essay began with an invitation to spend the year 1958-59 at the Center for Advanced Studies in the Behavioral Sciences. Once again, I was able to give undivided attention to the problems discussed below. Even more important, spending the year in a community composed predominantly of social scientists confronted me with unanticipated problems about the differences between such communities and those of the natural scientists among whom I had been trained. Particularly, I was struck by the number and extent of the overt disagreements between social scientists about the nature of legitimate scientific problems and methods. Both history and acquaintance made me doubt that practitioners of the natural sciences possess firmer or more permanent answers to such questions than their colleagues in social science. Yet, somehow, the practice of astronomy, physics, chemistry, or biology normally fails to evoke the controversies over fundamentals that today often seem endemic among, say, psychologists or sociologists. Attempting to discover the source of that difference led me to recognize the role in scientific research of what I have since called “paradigms.” These I take to be universally recognized scientific achievements that for a time provide model problems and solutions to a community of practitioners. Once that piece of my puzzle fell into place, a draft of this essay emerged rapidly.
이 에세이의 마지막 부분은 행동과학고등연구센터 the Center for Advanced Studies in the Behavioral Sciences에서 1958에서 59년까지 보낼 수 있는 초대로부터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나는 앞으로 논의할 문제들에 대해 전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수 있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주로 사회 과학자들로 구성된 커뮤니티에서 한 해를 보내면서 커뮤니티와 내가 훈련을 받은 자연 과학자들의 커뮤니티 간의 차이점에 대한 예상치 못한 문제에 맞닥뜨렸다는 것입니다. 특히, 나는 정당한 과학적 문제와 방법의 본질에 대해 사회 과학자들 사이에 명백한 불일치 발생 횟수와 정도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역사와 지식들은 자연과학자들이 사회과학 분야의 학자들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해 더 확고하고 영구적인 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어쨌든 천문학, 물리학, 화학 또는 생물학의 연구는 일반적으로 오늘날 심리학자나 사회학자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초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못합니다. 그 차이의 근원을 찾으려는 시도는 내가 이후 패러다임 paradigms "이라고 불렀던 것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대한 역할을 인식하게 이끌었습니다. 저는 한동안 실무자 커뮤니티에 모범적인 문제와 해결책을 제공하게 되면서 과학적인 업적으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이렇게 나의 퍼즐 조각이 제자리에 놓이게 되면서 이 에세이의 초안이 빠르게 떠올랐습니다.
The subsequent history of that draft need not be recounted here, but a few words must be said about the form that it has preserved through revisions. Until a first version had been completed and largely revised, I anticipated that the manuscript would appear exclusively as a volume in the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The editors of that pioneering work had first solicited it, then held me firmly to a commitment, and finally waited with extraordinary tact and patience for a result. I am much indebted to them, particularly to Charles Morris, for wielding the essential goad and for advising me about the manuscript that resulted. Space limits of the Encyclopedia made it necessary, however, to present my views in an extremely condensed and schematic form. Though subsequent events have somewhat relaxed those restrictions and have made possible simultaneous independent publication, this work remains an essay rather than the full-scale book my subject will ultimately demand.
그 초안 이후의 일은 여기에서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수정 보완된 형식에 대하여 몇 마디 언급을 하고자 합니다. 초판이 완성되고 크게 수정이 있을 때까지 나는 이 원고가 《통일 과학 국제 백과전서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Unified Science) 》의 한권으로 독점적으로 출간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선구적인 작업을 하는 편집자들이 먼저 그렇게 원했고, 그 다음에는 내가 확고하게 약속하였으며, 마침내 놀라운 재치와 인내심을 가지고 결과를 기다렸습니다. 나는 그들, 특히 찰스 모리스 Charles Morris에게서 크게 자극을 받은 결과로 나온 원고 초안에 대하여 많은 조언을 해 준 것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나 백과사전의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나의 견해는 극도로 압축하여 도식적인 형태로 제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후에는 이러한 제한을 다소 완화되었고 동시에 독립 출판도 가능하게 되었지만, 이 책은 나의 주제가 궁극적으로 추구할 본격적인 책이라기 보다는 에세이 형태를 띄고 있습니다.
Since my most fundamental objective is to urge a change in the perception and evaluation of familiar data, the schematic character of this first presentation need be no drawback. On the contrary, readers whose own research has prepared them for the sort of reorientation here advocated may find the essay form both more suggestive and easier to assimilate. But it has disadvantages as well, and these may justify my illustrating at the very start the sorts of extension in both scope and depth that I hope ultimately to include in a longer version. Far more historical evidence is available than I have had space to exploit below. Furthermore, that evidence comes from the history of biological as well as of physical science. My decision to deal here exclusively with the latter was made partly to increase this essay’s coherence and partly on grounds of present competence. In addition, the view of science to be developed here suggests the potential fruitfulness of a number of new sorts of research, both historical and sociological. For example, the manner in which anomalies, or violations of expectation, attract the increasing attention of a scientific community needs detailed study, as does the emergence of the crises that may be induced by repeated failure to make an anomaly conform. Or again, if I am right that each scientific revolution alters the historical perspective of the community that experiences it, then that change of perspective should affect the structure of post-revolutionary textbooks and research publications. One such effect—a shift in the distribution of the technical literature cited in the footnotes to research reports—ought to be studied as a possible index to the occurrence of revolutions.
나의 가장 근본적인 목표는 친숙한 자료에 대한 인식과 평가 방식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첫 번째 발표의 도식적 특성은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반대로, 여기에서 주장하는 방향 전환에 대해 자신의 연구를 준비한 독자는 에세이 형식이 더 암시적이고 동화하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습니다. 내가 궁극적으로 더 긴 버전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확장의 범위와 깊이 모두는 처음부터 설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내가 지면을 할애한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증거가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러한 증거는 생물학의 역사와 물리학의 역사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전적으로 다루기로 한 나의 결정은 부분적으로는 이 에세이의 일관성을 높여 주고 부분적으로는 현재의 역량에 근거하여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여기서 발전해야 할 과학에 대한 견해는 역사학적으로나 사회학적으로나 새로운 여러 종류의 연구의 잠재적인 결실을 암시합니다. 예를 들어, 이상치 또는 기대치에 어긋하는 현상은 과학계에서 점점 더 주목을 받는 방식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필요하며, 이상치가 반복적인 일치하지 않는 실패로 인해 촉발되는 위기의 출현도 마찬가지입니다. 또는 각각의 과학 혁명이 일어날 때 마다 공동체의 역사적 관점을 바뀐다는 나의 생각이 옳다면, 그 관점의 변화는 혁명 이후의 교과서와 연구 출판물의 구조에 영향을 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영향 중 하나로 각주에 인용된 기술 문헌의 연구보고서로 배포되는 방식의 변화는 과학 혁명 발생 가능 지표로 연구되어져야 합니다.
The need for drastic condensation has also forced me to forego discussion of a number of major problems. My distinction between the pre- and the post-paradigm periods in the development of a science is, for example, much too schematic. Each of the schools whose competition characterizes the earlier period is guided by something much like a paradigm; there are circumstances, though I think them rare, under which two paradigms can coexist peacefully in the later period. Mere possession of a paradigm is not quite a sufficient criterion for the developmental transition discussed in Section II. More important, except in occasional brief asides, I have said nothing about the role of technological advance or of external social, economic, and intellectual conditions in the development of the sciences. One need, however, look no further than Copernicus and the calendar to discover that external conditions may help to transform a mere anomaly into a source of acute crisis. The same example would illustrate the way in which conditions outside the sciences may influence the range of alternatives available to the man who seeks to end a crisis by proposing one or another revolutionary reform.4 Explicit consideration of effects like these would not, I think, modify the main theses developed in this essay, but it would surely add an analytic dimension of first-rate importance for the understanding of scientific advance.
과감한 축약이 필요하여 나는 중요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한 논의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과학 발전에서 패러다임 이전과 이후를 구분한 구별 방법이 너무나 개략적이었습니다. 초기 경쟁이 특징인 학파들은 저마다 패러다임이 매우 흡사합니다. 내가 보기에는 드물지만 두 패러다임이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환경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패러다임을 소유하는 것으로는 섹션 II에서 논의할 ‘발달론적 전환 developmental transition’을 위한 충분한 기준이 되지는 못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때때로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 외 과학 발전에 있어 기술적 진보나 외부의 사회적, 경제적, 지적 조건이 기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외부 조건이 단순한 변칙성으로 심각한 위기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발견을 하려면 코페르니쿠스와 달력 그 이상은 볼 필요가 않습니다. 같은 예는 과학 이외의 조건이 하나 또는 다른 혁명적 개혁을 제안하여 위기를 넘기려는 학자들이 활용할 수 있는 대안들의 범위에 영향을 주는 방식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효과를 명시적으로 고려한다고 해서 이 에세이에서 제시하는 주요 논제를 변경하지는 않겠지만, 과학적 진보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일등급으로 중요한 분석적 차원을 추가하였습니다.
Finally, and perhaps most important of all, limitations of space have drastically affected my treatment of the philosophical implications of this essay’s historically oriented view of science. Clearly, there are such implications, and I have tried both to point out and to document the main ones. But in doing so I have usually refrained from detailed discussion of the various positions taken by contemporary philosophers on the corresponding issues. Where I have indicated skepticism, it has more often been directed to a philosophical attitude than to any one of its fully articulated expressions. As a result, some of those who know and work within one of those articulated positions may feel that I have missed their point. I think they will be wrong, but this essay is not calculated to convince them. To attempt that would have required a far longer and very different sort of book.
마지막으로, 아마도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간의 제약을 이 에세이의 역사 지향적인 과학 관의 철학적 함축을 다루는 데 나의 처방법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분명히, 이런 방법은 의미가 있고, 주요 내용을 명확히 하여 문서화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해당 문제에 대해 현대 철학자들이 취한 다양한 입장에 대한 자세한 논의를 자제했습니다. 내가 회의를 표현했던 곳에서는 그것이 완전히 명확하게 표현된 어떤 표현보다 철학적 태도에 더 자주 영향을 미쳤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러한 명확한 입장 중 하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일부는 내가 그들의 요점을 놓쳤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틀릴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에세이는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계산된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시도하려면 훨씬 더 길고 다른 유형의 책에서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The autobiographical fragments with which this preface opens will serve to acknowledge what I can recognize of my main debt both to the works of scholarship and to the institutions that have helped give form to my thought. The remainder of that debt I shall try to discharge by citation in the pages that follow. Nothing said above or below, however, will more than hint at the number and nature of my personal obligations to the many individuals whose suggestions and criticisms have at one time or another sustained and directed my intellectual development. Too much time has elapsed since the ideas in this essay began to take shape; a list of all those who may properly find some signs of their influence in its pages would be almost coextensive with a list of my friends and acquaintances. Under the circumstances, I must restrict myself to the few most significant influences that even a faulty memory will never entirely suppress.
이 서문에서 설명하는 자서전의 단편들은 학문 활동과 내 생각을 구체화하는 데 도움을 준 기관 들 모두에게 내가 진 빚이기도 합니다. 그 빚들은 다음 페이지에 인용해서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앞에서나 다음에 언급하는 것은 숫자를 알려주는 것 이상의 것이 아니며, 제안과 비판이 나의 지적 발전을 지속할 수 있도록 이끌었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의무의 본질이 될 것입니다. 이 에세이의 아이디어가 구체화되기 시작한 후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 에세이의 각 페이지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록은 나의 친구나 지인의 목록과 거의 일치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결함이 있는 기억조차도 완전히 억제할 수 없는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영향으로 나 자신을 제어해야 합니다.
It was James B. Conant, then president of Harvard University, who first introduced me to the history of science and thus initiated the transformation in my conception of the nature of scientific advance. Ever since that process began, he has been generous with his ideas, criticisms, and time—including the time required to read and suggest important changes in the draft of my manuscript. Leonard K. Nash, with whom for five years I taught the historically oriented course that Dr. Conant had started, was an even more active collaborator during the years when my ideas first began to take shape, and he has been much missed during the later stages of their development. Fortunately, however, after my departure from Cambridge, his place as creative sounding board and more was assumed by my Berkeley colleague, Stanley Cavell. That Cavell, a philosopher mainly concerned with ethics and aesthetics, should have reached conclusions quite so congruent to my own has been a constant source of stimulation and encouragement to me. He is, furthermore, the only person with whom I have ever been able to explore my ideas in incomplete sentences. That mode of communication attests an understanding that has enabled him to point me the way through or around several major barriers encountered while preparing my first manuscript.
나에게 처음으로 과학사를 소개하고 과학 발전의 본질에 대한 나의 개념 변화를 주도한 사람은 당시 하버드 대학교 총장이었던 제임스 B. 코난트 James B. Conant였습니다. 이 과정이 시작된 이후로 그는 나의 원고 초안을 읽고 자신의 아이디어, 비평하는데 시간을 내어 주었으며 중요한 변화를 제안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코난트 박사가 시작한 역사적 지향적인 과목을 5년 동안 함께 가르쳤던 레너드 K. 내쉬 Leonard K. Nash는 내 아이디어가 처음 구체화되기 시작한 몇 년 동안 훨씬 더 적극적인 협력자였으며, 그 이후에 그는 많이 그리워 하기도 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캠브리지를 떠난 후 버클리의 동료인 스탠리 카벨 Stanley Cavell이 창조적인 사운딩 보드 creative sounding board로서의 자리를 떠맡았습니다. 주로 윤리와 미학에 관심이 있는 철학자인 카벨이 나와 매우 일치하는 결론에 도달했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 끊임없는 자극을 주였고 많은 격려를 해 주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내가 불완전한 문장으로 내 생각을 논의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 의사 소통 방식은 그는 내가 첫 원고를 준비하는 동안 직면한 몇 가지 주요 장벽을 해결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다른 방법으로 풀수 있는 방법으로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Since that version was drafted, many other friends have helped with its reformulation. They will, I think, forgive me if I name only the four whose contributions proved most far-reaching and decisive: Paul K. Feyerabend of Berkeley, Ernest Nagel of Columbia, H. Pierre Noyes of the Lawrence Radiation Laboratory, and my student, John L. Heilbron, who has often worked closely with me in preparing a final version for the press. I have found all their reservations and suggestions extremely helpful, but I have no reason to believe (and some reason to doubt) that either they or the others mentioned above approve in its entirety the manuscript that results.
그 책의 초안을 작성한 이후, 많은 친구들이 교정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만약 내가 가장 폭넓게 결단력 있는 기여를 해주신 4분께 감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버클리 대학의 폴 K. 피어벤드 Paul K. Feyerabend, 컬럼비아 대학의 어니스트 네이글 Ernest Nagel, 로렌스 방사선 연구소의 H. Pierre Noyes H. 피에르 노예스, 그리고 최종판을 준비하는데 있어서 나와 종종 긴밀하게 일했던 제자인 존 L. 힐브론 John L. Heilbron이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분들의 모든 의견과 제안들이 매우 도움이 된 것은 분명하지만, 앞서 언급한 다른 분들이 결과물인 원고 전체를 승인한다고 믿을 이유도 없고 그렇다고 의심할 이유도 없다도 없다는 점입니다.
My final acknowledgments, to my parents, wife, and children, must be of a rather different sort. In ways which I shall probably be the last to recognize, each of them, too, has contributed intellectual ingredients to my work. But they have also, in varying degrees, done something more important. They have, that is, let it go on and even encouraged my devotion to it. Anyone who has wrestled with a project like mine will recognize what it has occasionally cost them. I do not know how to give them thanks.
마지막으로 부모님, 아내, 그리고 자녀들에게 드리는 감사의 말씀은 조금은 다른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내가 가장 늦게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으로, 그분들 각자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하여 지적인 요소들을 기여해 왔습니다. 다양한 방식으로 더 중요한 역할을 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이 일을 계속되도록 지지해 주었고, 내가 헌신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기도 했습니다. 나 처럼 프로젝트에 씨름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때때로 가족들에게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T. S. K.
BERKELEY, CALIFORNIA February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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