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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주정뱅이를 읽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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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여선'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았다. 1965년생이라는 점이 가장 끌렸다. 

같은 시기를 살아온 세대가 느끼는 세상의 내밀함을 어떤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들려 줄지 궁금하여서다. 


매년 '이상문학수상집'을 꼭 읽었는데 나의 책꽂이에 2006년까지만 있다. 2007년부터 십년 이상 소설을 읽지 못했나보다. 

그 세월동안 경험한 것들이 소설 이상이라소설을 읽을 이유나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먼저 '이모'를 읽었다. 재미있다. 

이모는 소설에서 정확히 남편의 이모인 시이모님이다. 읽는 동안 너무나 짠 해서 한참동안 마음이 먹먹하다. 쉰살이 가깝도록 엄마와 동생들을 뒷바라지 하였지만, 신용불량자가 되는 사람으로, 비정규직으로 다시 10년을 가족의 빚을 갚는 사람으로, 이제 자신을 위해서 5년동안 모은 돈으로 겨우 '제멋대로' 사는데 췌장암에 걸리게 되는 사람의 험난한 삶을 보여준다.


p86 "네가 좋은 생각으로 사온 건 안다. 하지만 나는 내 가난에 익숙하고 그게 싫지 않다. 우리 서로 만나는 동안 만은 공평하고 정직해 지도록 하자..."


이모는 가난에 대한 꿋꿋한 자부심과 관계에 공평하고 정직하자는 철학이 크게 와 닿았다.

'봄밤'에서 영경은


p33 ...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울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 ... 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 절제여! 나의 귀여운 아들이여! 오오 나의 영감이여!


'서둘지 말자'는 5글자를 거의 한 페이지로 표현한다. 읽으면서 세익스피어가 생각날 정도로 감탄이 나왔다. 아마도

작가는 술을 즐기나보다. 자신이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삼인행'


p62 자연이든 관계든 오래 지속되어온 것이 파괴되는 데는 번갯불의 찰나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

'카메라'


p135 "그렇게 꽉 쥐지 말아요...놓아야 살 수 있어요."

p136 삶에서 취소할 수 있는 건 단 한가지도 없다.지나가는 말이든 무심코 한 행동이든, 일단 튀어나온 이상 돌처럼 단단한 필연이 된다.

'역광'


p142 날씨와 풍경, 꿈이나 사물 등에 오래 압도당하고 난 뒤면 그녀는 잠깐 동안 자신으로 되돌아오는 일에 어려움을 겪었다. 되돌아오는 게 두려운지 되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운지 알 수 없었다.

p151 자기는 정확히 그렇게 한 줄 알겠지만 달은 결코 자기 감정을 격조 있게 표현하지 못했다. 누군가에게 질투나 원한을 품을 수 있고 그에게 닥친 불행에 쾌감을 느낄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그토록 천하게 표현하는 것만은 용납할 수 없다고, 예술가로서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고 그녀는 무력하게 다짐했다.

'격조' '천하게' '용납' '용서' 작가들의 단어 선택 능력이 부럽다.

'실내화 한켤레'


p176 그 만남이 행인지 불행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 불행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만 감지되고 어떤 불행은 지독한 원시의 눈으로만 볼 수 있으며 또 어떤 불행은 어느 각도와 시점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불행은 눈만 돌리면 바로 보이는 곳에 있지만 결코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칼이 되어 꽂힐 때 인생에서 다시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안다. 혜련은 다시 용기를 가졌을까..

제일 마지막에 실린 '층'까지


1. 단편 드라마를 한 편 씩 보는 느낌이다.

2. 아귀가 딱딱맞는 치밀한 구성과 복선에 감탄을 하며 '이래서 그랬구나' 감탄하며 다시 되짚어 읽게 된다.

3. 현란한 ‘단어 장난’으로 의중 파악에 시간 낭비 되지 않아서 좋다.

"좀 더 가난해도 좋고 좀 더 고독해도 좋은 데, 끝내 명랑하자"가 삶의 화두이고 목표라는 권여선 작가를 알게 되어서 '좋은 친구' 한 명을 얻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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